#1.
맥이 약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요. 스트레스는 누구나 받아요. 잘 배출해내는게 중요합니다.
아파요.
이 쪽은 위, 이 쪽은 위에서 십이지장으로 내려가는 데고, 여기는 소화액을 내보내는 부분이에요. 기력이 떨어져서 장기들이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거에요.
침은 기를 사해서 치료하는 방법이라서 지금처럼 기운이 떨어져 있을 때는 놓지 않는게 좋아요. 그래도 당장 속이 막혀있으니 침을 놓아 일시적으로 치료를 하기로 하죠. 약을 드릴테니 주말 동안 드시고, 다음 주에도 불편하면 다시 오세요.
#2.
그녀는 그의 학생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클래식을 가르쳤다. 그녀의 또 다른 교수선생이 가르치듯 악보대로 틀에 박힌 연주가 아니라 기본 위에 연주가의 느낌을 담은 음악을 가르쳤다. 명문음대를 졸업하고 꽤 오랫동안 아파트 상가에서 작은 교습소를 하던 그는 어린 학생들에게 주려고 바구니에 사탕을 담아 교습소 입구에 두는 선생이었다. 눈가엔 웃음주름이 있었고, 연습을 많이 해가서 실력이 부쩍 늘은 학생의 연주를 들을 때면 치아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아저씨였다.
#3.
배는 쥐어짜는 듯이 아팠다. 생리통처럼 아랫배만 아프거나, 위염처럼 윗배만 아픈게 아니었다. 내장과 배의 근육 전체가 뒤틀리는 듯했고, 허리와 등의 근육이 뻐근했다. 온 몸에서 경련이 일었다. 구토감이 올라와 잠자리에서 돌아누워 밭은 기침을 뱉어냈지만 여전히 갑갑했다.
#4.
8살부터 이어진 인연은 그녀가 더 이상 음악을 밥줄로 삼지 않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선생들보다 싼 교습료에 방문교습도 하고 있었다. 대학생이 된 그녀는 취미로 음악을 계속 하기로 했고, 그녀와 그녀의 부모는 그를 선생으로 선택했다. 그녀는 선생 앞에서 자신이 여전히 어린 학생같이 느껴졌고, 그 역시 수업을 마칠 때면 사탕 한 두개를 악보대 위에 두곤 했다.
어느 날부터 선생은 불성실해지기 시작했다.
#5.
아픈 몸을 끌어안고 통증과 기침에 지쳐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다 습관처럼 새벽에 깨어 세수를 하고 옷을 입다가 쓰러졌다. 바닥에 앉아 고민을 하다가, 회사에 늦는다고 메시지를 보내두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웅크리면 통증이 조금 가시는 듯 하여,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6.
선생은 수업을 시작한지 불과 30분만에 쉬자고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끌어내거나,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한 낮의 수업에 소주냄새를 풍기며 들어올 때도 있었다. 어느 여름 날, 그가 그녀의 다리를 더듬으며 강제로 입을 맞추려 한 이후,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선생님이 술을 마시고 와서 가르쳐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술이라면 질색이었으므로, 그날 부로 선생을 그만두게 했다.
#7.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워낙 쉽게 잊어버리는 그녀는 그 일에 대해서 거의 잊고 지냈다. 그녀와 전에 사귀던 사람은 지나가는 얘기처럼 나온 추행에 대해서 그 선생을 죽여버리고 싶다며 무척 화를 냈지만, 그녀는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어 고맙지만, 이미 지나간 일인데 무얼 그리 화내냐고, 오히려 사귀던 이를 달랬다.
#8.
꿈 속에서 그 선생이 그녀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의 벨을 눌렀다. 이사한 집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는 인터폰에 비친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찌할지 고민했다. 선생이 재차 벨을 누르는데 갑자기 스무명 남짓의 경찰들이 그를 둘러싸며 연행하기 시작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선생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를 놓아주라 말한 뒤 집에 들게 했다. 새해이고, 연장자인지라 아랫목에 앉게한 후 그녀는 그에게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만원 드렸다.
#9.
여전히 웅크린 채 잠에서 깬 나는 이제서야 그를 온전히 용서했다는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10년이 걸렸어.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진심으로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선생처럼 인식조차 않고 있거나 혹은 끊임없이 인식되어 상처를 후벼내는 자들. 안타까워져 눈물이 났다.
#10.
조심조심 코트를 걸치고 평소보다 늦게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한 후 점심시간에 병원에 갔다. 배와 손바닥, 손목과 발가락에 침을 맞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완전히 집중한다는 것, 자신을 포함한 많은 아픈 인연을 진심으로, 전심으로 용서한다는 것.
그래, 어렵고, 오래걸릴 수도 있고, 힘든 일이지만 그 이상으로 가치있는 일이다.